숀 코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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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숀 코너리는 193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배우이자 영화 제작자로서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역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우유 배달부, 해군, 보디빌더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배우가 되었으며, 1962년 영화 《007 살인번호》를 시작으로 일곱 편의 본드 영화에 출연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본드 역할 외에도 《언터처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2006년 은퇴 후, 2020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스코틀랜드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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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코너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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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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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토머스 숀 코너리 |
출생일 | 1930년 8월 25일 |
출생지 |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
사망일 | 2020년 10월 31일 |
사망지 | 리포드 케이, 바하마 |
직업 | 배우 프로듀서 |
활동 기간 | 1954년–2007년, 2012년 |
배우자 | 다이앤 실렌토 (1962년 결혼, 1974년 이혼) 미슐린 로크브륀 (1975년 결혼) |
자녀 | 제이슨 코너리 |
친척 | 닐 코너리 (남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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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기사 작위 (2000년) |
웹사이트 | seanconnery.com |
출연 작품 목록 | |
전체 목록 | 전체 목록 |
수상 내역 | |
아카데미상 | 남우조연상 1987년 『언터처블』 |
MTV 무비 어워드 | 최고의 스크린 듀오 1996년 『더 록』 |
AFI상 | 평생공로상 2006년 |
유럽 영화상 | 공로상 2005년 |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 남우주연상 1987년 『장미의 이름』 평생공로상 1997년 |
골든 글로브상 | 남우조연상 1987년 『언터처블』 세실 B. 데밀 상 1995년 |
토니상 | 연극 작품상 1998년 『』 |
기타 수상 | 전미 비평가 위원회상 남우조연상 1987년 『언터처블』 공로상 1993년 |
2. 생애
숀 코너리는 1930년 8월 25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이자 트럭 운전수였고, 어머니는 청소부였다. 그의 가족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혈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는 개신교 신자였다.[13][14][15][16]
어린 시절 "토미"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18세에 키가 188cm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10대 시절에는 "빅 탐"으로 알려졌으며, 14세에 성인 여성과 관계를 갖기도 했다.[16]
에든버러의 세인트 커스버트 협동 조합에서 우유 배달부로 일했으며,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영국 해군에 복무했다. 해군 복무 중에는 십이지장 궤양으로 인해 의병 제대했다.[17][18][19] 이후 트럭 운전사, 인명 구조원, 예술가 모델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20]
1953년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에 스코틀랜드 대표로 출전했다.[21] 축구에도 재능을 보여 보니리그 로즈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맷 버스비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배우의 길을 선택했다.[23][24][25]
배우로 활동하면서 1962년부터 1971년까지, 그리고 1983년에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본드... 제임스 본드"라는 대사는 유행어가 되었다.[44] 본드 역 외에도 《마니》(1964), 《언덕》(1965), 《왕이 되려 했던 사나이》(1975), 《장미의 이름》(1986), 《언터처블》(1987),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1989), 《붉은 10월》(1990), 《더 록》(1996)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2006년 공식 은퇴를 선언했고, 2012년 애니메이션 영화 《빌리 경》의 목소리 연기를 맡기도 했다.[90][94] 만년에는 치매를 앓았으며, 2020년 10월 31일 바하마 자택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폐렴, 노쇠, 심방세동으로 인한 호흡 부전이었다.[188][189][166][190][191][192][193]
2. 1. 어린 시절과 초기 경력
토마스 숀 코너리는 1930년 8월 25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왕립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났으며, 부계 조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7][8] 그의 어머니 유피미아 맥베인 "에피" 맥클레인은 청소부였고,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이자 트럭 운전사였다.[13] 그의 부계 증조부모 중 두 명은 19세기 중반에 웨스퍼드,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로 이민을 왔으며, 그의 증조부 제임스 코너리는 아일랜드 여행자였다.[16] 그의 나머지 가족은 스코틀랜드 혈통이었으며, 그의 외가 증조부모는 파이프와 Skye의 Uig에서 온 토착 스코틀랜드 게일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었다.[14][15] 그의 아버지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고, 그의 어머니는 개신교 신자였다.

코너리는 어린 시절 "토미"라고 불렸으며, 초등학교 시절에는 키가 작았지만 12살 무렵부터 급격히 성장하여 18살에 약 1.83m에 달했다.[16] 십 대 시절에는 "빅 탐"으로 알려졌으며, 14세에 ATS 제복을 입은 성인 여성과 처음 관계를 가졌다.[16] 코너리는 "셰이머스"라는 아일랜드 친구가 있었는데,[16] 둘이 함께 있을 때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코너리의 중간 이름인 숀을 사용하여 두 이름의 두운을 강조했다. 이후 코너리는 중간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16]
코너리의 첫 직업은 에든버러의 세인트 커스버트 협동 조합에서 우유 배달부였다.[17] 1946년 16세의 코너리는 영국 해군에 입대했으며, 그 기간 동안 두 개의 문신을 새겼다. 그의 문신은 가족과 스코틀랜드를 반영하는 것으로, 하나는 '엄마와 아빠', 다른 하나는 '영원한 스코틀랜드'라고 적혀 있다.[18] 그는 해군 포술 학교와 대공포 부대에서 포츠머스에서 훈련을 받았고, HMS ''Formidable''의 수병으로 배정되었다.[19] 코너리는 의학적인 이유로 19세에 해군에서 제대했는데, 십이지장 궤양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협동 조합으로 돌아가 트럭 운전사, 포토벨로 수영장의 인명 구조원, 노동자, 예술가 모델 등 여러 직업을 가졌다.[20] 코너리는 18세에 보디빌딩을 시작했으며, 1951년부터 전 영국군 체육 교관인 엘링턴과 함께 집중 훈련을 받았다. 그는 1953년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에서 주니어 부문 3위를 차지했다.[21]
코너리는 열렬한 축구 선수였으며, 젊은 시절에 보니리그 로즈에서 활약했다.[23] 그는 이스트 파이프에서 테스트 제안을 받았고, ''사우스 퍼시픽'' 투어 중에는 맷 버스비가 스카우트하러 온 지역 팀과의 경기에서 뛰었다.[24] 버스비는 그의 신체적 기량에 깊은 인상을 받아 경기 직후 코너리에게 주급 25GBP의 계약을 제안했지만, 코너리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25]
1951년, 코너리는 킹스 극장의 무대 뒤편에서 일을 도왔고,[21] 1953년 런던에서 열린 보디빌딩 대회에서 사우스 퍼시픽 오디션 소식을 듣고 해군 합창단 소년 역할로 출연했다.[21] 1954년에는 마이클 케인을 처음 만났고, 로버트 헨더슨을 통해 연극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에롤 플린과 안나 네이글과 함께 ''봄의 라일락''에 엑스트라로 출연했고, 여러 엑스트라 역할을 맡으며 베이비시터로 일하기도 했다.
1957년, 코너리는 에이전트 리차드 해튼을 통해 첫 영화 ''노 로드 백''에서 스파이크 역을 맡았고, BBC 텔레비전의 ''헤비급 레퀴엠''에서 마운틴 맥린톡 역을 맡았다. 이후 ''지옥의 운전자''(1957), ''액션 오브 더 타이거''(1957), ''타임 록''(1957) 등에 출연했다.

1958년, 코너리는 ''또 다른 시간, 또 다른 장소''에서 라나 터너와 함께 출연했는데, 촬영 중 터너의 남자친구 조니 스톰파나토가 코너리에게 총을 겨누는 사건이 발생했다.[29] 코너리는 그를 무장 해제하고 눕혔고, 스톰파나토는 세트에서 쫓겨났다.[30]
1959년, 코너리는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 영화 ''다비 오길과 요정들''에 출연했다.[33] 그는 또한 ''어드벤처 스토리''와 ''안나 카레니나'', ''맥베스'' 등에서 텔레비전 역할을 맡았다.[34]
2. 2. 제임스 본드 역할 (1962-1971, 1983)
숀 코너리는 제임스 본드 역을 맡으면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는 처음에 영화 시리즈 참여를 꺼렸지만, 이 프랜차이즈가 성공하면 자신의 영화 경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36][37][38] 1962년부터 1967년까지 코너리는 Eon Productions에서 제작한 첫 5편의 본드 영화(''007 살인번호'', ''위기일발'', ''골드핑거'', ''썬더볼 작전'', ''두 번 산다'')에서 007 역할을 맡았다. 이후 1971년에 7번째 영화인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로 복귀했고, 1983년에는 잭 슈워츠먼의 Taliafilm에서 제작한 ''썬더볼 작전'' 리메이크작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에서 마지막으로 본드 역을 맡았다. 이 7편의 영화는 모두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며, 코너리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는 미국 영화 연구소에서 영화 역사상 세 번째로 위대한 영웅으로 선정되었다.[39]- -|]]|thumb|left|1971년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촬영 중인 코너리
코너리의 본드 연기는 테렌스 영 감독의 스타일리시한 지도에 힘입은 바가 크다. 영은 코너리의 육체적 우아함과 존재감을 액션에 활용하면서 그를 다듬었다. 미스 머니페니 역을 맡은 로이스 맥스웰은 "테렌스가 숀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저녁 식사에 초대해서 걷는 법, 말하는 법, 심지어 먹는 법까지 가르쳤다"라고 말했다.[42] 이러한 지도는 성공적이었고, 코너리는 ''007 살인번호'' 개봉 후 매주 수천 통의 팬레터를 받으며 영화계의 주요 섹스 심벌이 되었다.[43]
1962년 영화 ''007 살인번호''가 개봉된 후, "본드... 제임스 본드"라는 대사는 서구 대중문화의 유행어가 되었다. 영화 평론가 피터 브래드쇼는 "영화 역사상 어떤 캐릭터보다도 유명한 자기 소개다."라고 썼다.[44]
1965년 ''썬더볼 작전'' 촬영 중, 코너리는 에밀리오 라르고의 수영장에 있는 상어와 관련된 장면에서 위험에 처했다. 켄 아담에게 수영장 안에 특수 플렉시 유리 칸막이를 설치하도록 요구했지만, 상어 한 마리가 칸막이를 통과해버려 그는 즉시 수영장을 나와야 했다.[45]
본드는 그를 스타로 만들었지만, 코너리는 역할에 지쳐갔고 프랜차이즈가 그에게 가하는 압력에 질렸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이 모든 본드 역할에 질렸다"[46], "나는 항상 그 빌어먹을 제임스 본드를 싫어했다. 그를 죽이고 싶다"고 말했다.[47]
1983년, 배우 탈리아 샤이어 등과 함께 자율 제작한 본드 영화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에서도 본드를 연기하여, 총 7편의 작품에서 본드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PSO(프로듀서즈 세일즈 오가니제이션)가 세계에 판매하고, 워너 브라더스가 북미 배급을 맡았다.[180] 코너리는 자기 소개 대사인 "''The name is Bond, James Bond.''"를 처음 사용했고, 이후 2편을 제외한[181] 모든 작품에서 사용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본드, 혹은 본드의 패러디 배역(예: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 『더 록』 등)을 연기하는 데에는 적극적이었지만, 프로듀서인 앨버트 R. 브로콜리와 해리 잘츠먼과의 관계는 좋지 않아, "본드를 죽이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며,[179] 시리즈 복귀에는 소극적이었다. 로저 무어와는 무명 시절부터 친구였으며, 함께 출연을 바랐을 정도로 친한 친구였다.
2. 3. 본드 이후의 활동 (1970년대-2003)
코너리는 제임스 본드 역할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 역할에만 갇히는 것을 우려하여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마니》(1964)에서는 티피 헤드렌과 함께 출연했고, 시드니 루멧 감독의 《언덕》(1965)에서는 본드와는 다른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 《언덕》은 비평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재정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루멧은 코너리의 연기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53]1970년대에는 존 휴스턴 감독의 《왕이 되려 했던 사나이》(1975)에서 마이클 케인과 함께 출연했는데, 두 배우 모두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62][63] 같은 해 《바람과 사자》에서는 캔디스 버겐과, 1976년에는 《로빈과 마리안》에서 오드리 헵번과 함께 출연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64] 또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1974), 《머나먼 다리》(1977) 등에도 출연했다.
1980년대에는 《시간 도둑》(1981)에서 아가멤논 왕 역할, SF 스릴러 《아웃랜드》(1981)에서 보안관 역할 등을 맡았다. 1983년에는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에서 다시 한번 본드 역할을 맡았지만, 제작 과정에서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154] 이후 《장미의 이름》(1986)으로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상업 영화에 대한 관심을 되살렸다.[154]
1987년 《언터처블》에서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출연하여 아카데미 남우조연상과 골든 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76] 1989년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에서는 해리슨 포드와 함께 출연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77]
1990년대 이후에도 《붉은 10월》(1990), 《더 록》(1996), 《엔트랩먼트》(1999) 등 흥행작에 출연했다. 1996년에는 《드래곤하트》에서 드래곤의 목소리 연기를 맡기도 했다.[78]
2003년 《젠틀맨 리그》 촬영 중 겪은 어려움으로 인해 배우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81] 이후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간달프 역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82]
2. 4. 은퇴와 사망 (2006-2020)
코너리는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간달프 역을 거절했는데, 시나리오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82] 그는 전 세계 흥행 수익의 15%와 함께 3천만 달러를 제안받았는데, 이는 그에게 4.5억달러의 수익을 안겨줄 수 있었다.[83][84] 그는 또한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알버스 덤블도어로 출연할 기회와 ''매트릭스'' 3부작에서 아키텍트로 출연할 기회를 거절했다.[85][86] 2005년, 그는 바하마에서 녹음 프로듀서 테리 매닝과 함께 ''007 러시아에서 온 사랑'' 비디오 게임에 대한 음성 연기를 녹음하고 그의 모습을 제공했다.[87][88] 코너리는 제작사 일렉트로닉 아츠가 본드 목소리를 위해 자신에게 접근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89]
코너리가 2006년 6월 8일 AFI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을 때, 그는 배우 은퇴를 확인했다.[90] 코너리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드는 바보들"에 대한 환멸을 은퇴 결정의 이유로 언급했다.[91] 2007년 6월 7일, 그는 네 번째 ''인디아나 존스'' 영화에 출연할 것이라는 소문을 부인하며 "은퇴는 너무 재밌다"고 말했다.[92] 2010년, 코너리의 청동 흉상 조각상이 에스토니아 탈린에 있는 스코틀랜드 클럽 외부에 설치되었다. 이 클럽은 에스토니아의 스코틀랜드 애호가와 소수의 해외 거주 스코틀랜드인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93] 2012년, 코너리는 스코틀랜드 애니메이션 영화 ''빌리 경''에서 타이틀 캐릭터의 목소리를 연기하기 위해 잠시 은퇴를 번복했다. 코너리는 80분 분량으로 확장된 버전의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94]
만년에는 치매를 앓고 있었으며, 고통스러워했다는 것이 부인에 의해 언급되었다.[188][189] 코너리는 2020년 10월 30일 밤에서 31일 새벽에 걸쳐 체류 중이던 바하마 자택에서 사망했다.[166][190][191] 이와 관련하여 이온 프로덕션의 웹사이트에서 발표가 이루어졌으며, 동사 홍보 담당자에 따르면, 금요일 말에서 토요일 초에 숨을 거두는 것을 가족에 의해 확인되었다.[192] 이후 TMZ가 입수한 사망진단서에 따르면, 코너리는 폐렴, 노쇠, 그리고 심방세동으로 인한 호흡 부전으로 사망했으며, 사망 시각은 10월 31일 오전 1시 30분으로 기록되었다.[193]
3. 개인사
토머스 숀 코너리는 1930년 8월 25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왕립 산부인과 병원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셉 코너리는 공장 노동자이자 트럭 운전사였고, 어머니 유피미아 맥베인 "에피" 맥클레인은 청소부였다. 부계 조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7][8] 그는 이후 철거된 건물인 176 Fountainbridge에서 자랐다.[9]
그의 부계 증조부모 중 두 명은 19세기 중반에 아일랜드 웨스퍼드에서 스코틀랜드로 이민을 왔으며,[16] 그의 나머지 가족은 스코틀랜드 혈통이었다.[14][15] 그의 아버지는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는 개신교 신자였다. 코너리에게는 남동생 닐이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키가 작았지만, 12살 무렵부터 급격히 성장하여 18살에 키가 약 1.83m에 달했다.[25] 코너리는 십 대 시절에 "빅 탐"으로 알려졌으며, 14세에 ATS 제복을 입은 성인 여성과 처음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18]
코너리의 첫 직업은 에든버러의 세인트 커스버트 협동 조합에서 우유 배달부였다.[17] 1946년 16세의 코너리는 영국 해군에 입대했으며, 의학적인 이유로 19세에 해군에서 제대했는데, 이는 그의 가족의 이전 세대 남성 대부분이 앓았던 십이지장 궤양 때문이었다.[4] 제대 후 그는 협동 조합으로 돌아가 트럭 운전사, 포토벨로 수영장의 인명 구조원, 노동자, 예술가 모델 등 여러 직업을 가졌다.
코너리는 18세에 보디빌딩을 시작했으며, 1951년부터 전 영국군 체육 교관인 엘링턴과 함께 집중 훈련을 받았다.[31] 1953년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에 스코틀랜드 대표로 출전한 경력도 있다. 코너리는 미국인들이 근육 크기 때문에 종종 대회에서 자신을 이겼고, 코너리와 달리 근육량을 잃을 수 있는 운동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보디빌딩에서 금세 좌절했다고 말했다.[35]
코너리는 열렬한 축구 선수였으며, 젊은 시절에 보니리그 로즈에서 활약했다.[23] 그는 이스트 파이프에서 테스트 제안을 받았다. 맷 버스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이 스카우트하러 온 지역 팀과의 축구 경기에서 코너리가 뛰었는데,[24] 버스비는 그의 신체적 기량에 깊은 인상을 받아 경기 직후 코너리에게 주급 25GBP의 계약을 제안했다. 코너리는 유혹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일류 축구 선수는 30세가 되면 전성기가 지날 수 있고, 나는 이미 23살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고, 그것은 내 가장 현명한 결정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25]
코너리는 극진 가라테에서 명예 쇼단 (1단)을 받았다.[112] 1990년대에 바하마로 이주했으며, 뉴 프로비던스에 있는 리포드 케이에 저택을 소유했다.[113]
3. 1. 결혼과 가족
코너리는 1962년부터 1974년까지 배우 다이앤 실렌토와 결혼했으나,[95] 1971년에 별거했다.[96] 그들 사이에는 아들 제이슨 조셉이 있었다. 코너리는 실렌토의 1967년 소설 《조작자》의 표지 그림을 그렸다.[97] 코너리는 1970년대 초 별거 중에 다이앤 캐넌,[98] 질 세인트 존,[99] 라나 우드,[100] 캐롤 몰로리,[101] 막다 코노프카와 데이트를 했다.[102] 실렌토는 2006년 자서전에서 코너리가 그들의 관계 동안 그녀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했다고 주장했다.[103][104] 코너리는 여성 학대에 대한 그의 혐의된 지지 때문에 2006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의 출연을 취소했다. 그는 1965년 플레이보이 잡지에 "여성을 때리는 데 특별히 잘못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자를 때리는 방식으로는 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106] 그는 또한 1993년 배니티 페어에 "경계선까지 가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걸 찾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대결을. 그들은 한 대 맞고 싶어합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105] 2006년, 코너리는 런던 타임스에 "어떤 상황에서도 여성에 대한 어떤 수준의 학대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106]
코너리는 1975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계 모로코인 화가 미셸린 로크브룬(1929년 4월 4일 출생)과 결혼했다.[108] 코너리는 1980년대 후반에 가수이자 작곡가인 린지 드 폴과 불륜 관계를 가졌는데, 린지 드 폴은 나중에 코너리의 가정 폭력에 대한 견해 때문에 그와의 관계를 후회했다.[109]
3. 2. 스코틀랜드 독립 지지
숀 코너리는 스코틀랜드 독립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했다.[214] 그는 중도 좌파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의 회원이었다.[122][123]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스코틀랜드 독립을 지지하며, 코너리는 2011년에 "''보울러와 버닛''은 스코틀랜드 국민당과의 오랜 관계의 시작일 뿐이었다"라고 말했다.[55] 코너리는 재정적으로,[124] 개인적인 활동을 통해서 당을 지원했다. 1967년, 그는 1967년 글래스고 폴록 보궐선거에서 스코틀랜드 국민당 후보였던 조지 레슬리에게 편지를 써서 "나는 우리의 자원과 기술로 우리 모두가 자랑스러워하고 다른 국가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번영하고 활기차고 현대적인 자치 스코틀랜드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라고 말했다.[125] 그는 영국 의회가 영국 내 정치 활동에 대한 해외 자금 지원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킨 2001년에 스코틀랜드 국민당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했다.[124]코너리는 2000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나이트 작위를 받았지만,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수여식에는 민족 의상인 킬트를 정장으로 입고 나타났다. 또한 코너리는 "스코틀랜드가 독립할 때까지 나는 죽어도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지 않겠다"고까지 언급했다.[172]
3. 3. 논란
숀 코너리는 스코틀랜드 독립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였다.[214] 미국 맨해튼 거주 당시에는 이웃 주민으로부터 3000만달러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215]조세 회피 혐의에 대해 숀 코너리는 2003년에 1997년과 1998년 사이, 그리고 2002년과 2003년 사이에 370만파운드의 영국 세금을 납부했음을 보여주는 문서를 공개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그가 세금 납부 목적으로 지속적으로 영국에 거주했다면 세금이 훨씬 더 높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126][127]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를 앞두고 코너리의 형제 닐은 코너리가 독립 지지자들을 결집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조세 회피 상태로 인해 그가 스코틀랜드에서 보낼 수 있는 날짜가 크게 제한되었기 때문이다.[128]
코너리가 1999년에 마르베야 별장을 매각한 후, 스페인 당국은 조세 회피 조사를 시작하여 재무부에 550만파운드의 사기를 쳤다고 주장했다. 코너리는 이후 관계자들에 의해 무혐의 처리되었지만, 그의 아내와 다른 16명은 스페인 재무부를 속이려 한 혐의로 기소되었다.[129][130]
전 부인 다이앤 실렌토는 2005년에 출판한 자서전[202]에서 11년의 결혼 기간 동안 육체적,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았다고 폭로했다.[203] 1965년에는 실렌토가 "술에 취해" 귀가하자 코너리에게 맞았다고 한다.[204][205]
2008년, 실렌토는 다시 전 남편을 중상 모략하며, 코너리가 외아들 제이슨에게 자립하여 생계를 꾸리도록 8500만파운드의 재산 중 1페니도 상속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206] 그러나 코너리는 이를 부인하며 아들과의 관계는 좋다고 말했고, 폭력 의혹에 대해서도 다툴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혔다. 또한 이혼할 때 제이슨과 실렌토의 딸 교육비로 85000GBP의 신탁 재산을 마련했지만, 지금은 "당연히 더 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07] 제이슨 본인도 실렌토의 의견을 전면 부인하며, 아버지는 폭군이 아니며 아버지가 번 돈을 어떻게 할지는 아버지 마음이라고 말했다.[208] 그러나 실렌토는 코너리가 34세 때, 치료 과정에서 당시에는 합법이었던 LSD를 사용했고, 그것이 학대를 일으켰다고 비난했다.[209]
4. 출연 작품
우츠미 켄지 (NET판)
미야모토 미츠루 (TV 도쿄판)
와카야마 겐조 (TBS 재방송판/소프트판)
테라소마 마사키 (소프트판)
와카야마 겐조 (니혼 TV판/소프트판)
우츠미 켄지 (TBS 재방송판/소프트판)
오오츠카 아키오 (소프트판)
와카야마 겐조 (기내 상영판)
사사키 카츠히코 (소프트판)
쵸 카츠미 (BD판)
이시다 타로 (비디오판)
골든 글로브상 남우조연상 수상
아리카와 히로시 (TV 아사히판)
사카구치 요시테이 (소프트판)
사카가와 테츠로 (소프트판)
모리카와 키미야 (기내 상영판)
와카야마 겐조 (니혼 TV판/후지 TV판)
사카구치 요시테이 (TV 아사히판)
긴가 반죠 (소프트판 2)
나카츠기 죠 (기내 상영판)
사카구치 요시테이 (TV 아사히판)
코바야시 키요시 (소프트판)
와카야마 겐조 (후지 TV판/TV 도쿄판)
와카야마 겐조 (TV 도쿄판)
사카구치 요시테이 (TV 아사히판)
사카구치 요시테이 (TV 아사히판)
와카야마 겐조 (TV 도쿄판)
무기히토 (기내 상영판)
무기히토 (기내 상영판)
겸 제작 총지휘